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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단 소식

소식지(창간호) 문화인 노회찬 - 내 친구, ‘문화인’ 노회찬

재단활동 2019. 06. 27

(2019.5.24)
 


 

글 : 이진성 (고교동창 / 연극 배우- 극단 성북동비둘기)


아직은 노회찬과 가장 기뻤던 순간들 마저도 편안히 기억해내지 못합니다.
더구나 이 글은 지극히 사적인 기억의 기록입니다. 당연히 매우 망설여집니다.
 

그런데 장례식장에서 제가 놀란 사실이 하나 있습니다. 그곳에는 생전에 노회찬 의원을 한 번 직접 본 적조차 없는 많은 분들이 오셨습니다. 그런데 그분들에게 ‘노회찬’은 TV 화면 속 또는 신문 기사 사진 속 그 공인(公人) 누구가 아니었습니다. 각자의 생(生)에 극히 개인적인 무언가를 남기고 간, 각기 한 사람 한 사람 들에게 특별한 의미의 누구였다는 걸 알았습니다. 그렇게 많은 사람들과 그토록 개별적으로 관계를 맺을 수 있었다는 사실을 저는 믿을 수 없습니다.
 

가장 사적인 것이 오히려 가장 공적일 수도 있다는 어설픈 핑계를 대며 노회찬 의원과 함께 했던 저의 개인적인 이야기 중 하나를 공개합니다.
 

노회찬과 저는 고교 동창입니다. 그러나 흔히 말하는 절친하고는 다소 거리가 있었습니다. 학창 시절에는 3년 내내 둘이 같은 반은커녕 이과, 문과로 나뉘어 서로의 존재 정도나 어렴풋이 기억할까 말까 한 그런 동창에 불과했습니다. 친구 하숙방에 같이 뒹굴며 청춘의 아픔을 나눈 그런 애틋한 추억 같은 건 아예 없었습니다.
 

2004년 그가 17대 국회의원이 됐을 때 드디어 제도권에 진입한 정치인 노회찬을 후원하자는 친구들이 자연스레 모였고, 한, 두 다리 건너 저에게도 함께 하자는 제안이 왔습니다. 저는 흔쾌히 응했고 그때 비로소 저와 노회찬과의 개인적 인연이 시작되었습니다. 후원회원에 고교 동창이니 만나면 허물없이 반가운 사이인 건 분명하나 마음 저 깊은 속 개인적인 고민까지 나누는 그런 관계라고 까지는 할 수 없었습니다. 그 뒤에 이러 저러한 일로 노회찬 의원과 만날 기회가 많아졌지만 둘 사이의 친밀도는 계속 그 정도에 머물렀습니다. 어찌 보면 오히려 그게 자연스러운 거였겠죠. 그는 오로지 저의 정치적 양심이었습니다. 그 사고(?) 전까지는...
 

그러다 제가 사고를 쳤습니다. ( 이건 당시 제가 노의원에게 말 한 표현 그대로입니다).
 

저는 대학 시절에 연극 동아리 활동을 하였습니다. 졸업 후 직장을 다니고 또 사업이랍시고 뛰어다니면서 연극과는 한참 먼 삶을 살았으나 언제고 한 번쯤 연극 무대에 다시 서보고 싶다는 막연한 꿈을 마음 한구석에 늘 갖고 있었습니다. 사실 그 실현 가능성 같은 것은 전혀 염두에 없었으니 몽상이라는 것이 더 맞는 말이겠죠. 그런데 2006년 어느 날 거짓말처럼 그 꿈이 현실이 돼서 눈앞에 왔습니다. 연출 활동을 하던 예전 동아리 후배 하나가 연극 한 번 같이 하자고 유혹했습니다. 저는 아무런 앞뒤 생각 없이 응낙하고 말았습니다.
 

얼떨결에 일은 벌어졌는데 보통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무엇보다 주위 사람 아무에게도 차마 얘기하지 못했습니다. 누구에게라도 말하면 그 반응은 ‘미친 X’ 소리 듣기 딱 알맞은 상황이었습니다. 모든 일을 혼자 안고 끙끙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다 어느 날인가 공적(公的)인 어떤 일로 의원 회관으로 노의원을 만나러 갔습니다. 일을 마치고 주섬주섬 가방을 챙기며 예정에 없던 말을 덜컥해버렸습니다.
 

“나 사고 쳤다!”
 

노의원이 의아한 눈으로 저를 봤습니다. 어쩌면 “이놈이 사고 치고 무슨 부탁이라도 하려는 거 아냐?” 라고 생각했을 지도 모르죠. 저는 딱 지금 이 글에 서술된 만큼 간략하게 자초지종을 설명했습니다. 그러고 보니 그때까지 노의원은 내가 대학시절 연극을 했었다는 사실도 모르고 있었습니다.
 

제 얘기를 들은 후 그때의 노의원의 모습을 생생히 기억합니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서는 입이 귀밑까지 가도록 활짝 웃으며, 쫙 핀 손가락을 한껏 뒤로 제치고 악수를 청하던 모습. 노회찬을 가깝게 아는 사람들 모두 잘 알고 있는 그 모습.
 

그리고는 거두절미하고 제게 말했습니다.
 

“축하한다”
 

그랬습니다. 저는 미리 계획했던 것은 전혀 아니었으나 아마도 노의원을 만나자 직감했겠죠, 내 주위에 나의 고민을 다 털어놓는 더 친한 절친이 많이 있었지만, 나의 이 ‘미친 짓’을 조금이라도 이해해 줄 가능성이 가장 높은 사람이 노회찬이라는 사실을.
 

그 후 저는 한 작품이 두 작품 되고 두 작품이 세 작품 되고 그러다 어찌어찌하여 연극배우를 직업으로 갖게 되었습니다. 노의원은 내가 따로 연락을 하지 않아도 공연을 계속 찾아주었고 바빠 못 올 때는 축하 문자를 보내 주었습니다. 어떤 때는 의원실 보좌관님들까지 우르르 같이 몰고 왔습니다.
 

저는 주위에 많이 봅니다. 연극을, 예술을, 문화를 사랑하기보다는 연극을, 예술을, 문화를 사랑한다는 사실을 남들에게 알리는 것이 더 중요한 사람들.
 

노회찬은 그런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자신의 말 그대로의 삶을 살았습니다.
 

“모든 시민이 악기 하나쯤은 연주할 수 있는 나라”
 

한국 정치판에 난무하는 역겨운 레토릭 사이에서 이렇게 아름다운 말을 할 수 있었던 유일한 사람이었습니다.
 

저에게는 무엇보다 50 이 다 된 나이에 아무 대책 없이 연극을 하겠다는 미친 선언을 했을 때 진정으로 축하하고 격려해 줄 것이라 믿을 수 있었던 첫 번째 친구였습니다.


회찬아.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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