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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단 소식

소식지(창간호) 음식天國 노회찬 (1)을밀대

재단활동 2019. 06. 27

(2019.5.24)
 


음식天國 노회찬

<1>평양냉면집 을밀대에서


  서울 마포구 염리동의 평양냉면집 을밀대乙密臺는 천국에서 잠시 유배를 왔다가 돌아가버린 노회찬이란 선인善人의 채취가 많이 남아 있는 곳이다. 그가 이 냉면집을 출입하기 시작한 것이 1990년대 초중반쯤이라고 하니 그와 이 집에 얽힌 내력內歷도 육수맛만큼이나 진하고 깊을 듯하다. 
 


 

“을밀대에서 가장 행복합니다. 2004. 6.15  국회의원 노회찬”
 

  그가 을밀대에 남겨놓은 글귀다. 
 

  이 집의 냉면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냉면을 먹으며 얼마나 행복감을 느끼는 지, 그리고 자신이 꿈꾸는 진보정당의 집권을 위해 드디어 의회에 진출한 사실을 세상에 알리는 일곱 자의 서명. 
 

  노회찬은 미식가美食家이기도 했다. 산해진미의 탐식을 즐기는 도락가란 말이 아니다. 동네 뒷골목에 숨은 맛집을 찾아다니는 방랑식객이었고, 음식만들기도 잘한 용문객잔의 주방장이었다. 노회찬이란 희대의 정치인을 미식이란 틀로 재단하는 것은 어불성설이지만, 노회찬이라는 사람의 인간미人間味 속에 음식의 세계가 있다고 하는 것은 그 자신에게나, 주변의 지인들에게나 다같이 축복이었다.
 

  노회찬은 여러 음식 중에서도 특히 냉면을 좋아했다. 평양 옥류관에서 냉면 한그릇에 사리를 다섯 번이나 추가하는 바람에 지배인이 특별방문록을 들고올 정도였다. 을밀대는 그런 그가 서울에서 가장 사랑한 냉면집. 거리 집회로, 정당살림살이로 목이 쉬고 땀에 절은 몸으로 노회찬을 따라나섰다가 이 을밀대에서 솔솔 풍기는 육수맛과 쫄깃한 냉면발에 휘감겨 잠시 시름을 덜은 이가 얼마나 많았을까. 겨자맛처럼 코끝이 찡해져 온다.
(일러스트 : 김경래)
 

  이북에서 내려와 경상북도에 정착한 김인주가 1976년 대구에서 상경해 현재의 염리동 이 자리에 문을 연 을밀대는 1980년대 후반부터 냉면애호가, 미식가들 사이에 입소문이 나기 시작했다. 김대중 대통령의 평양방문 등 남북관계 호전의 바람을 타고 하루에 천그릇을 파는 냉면집으로 성장했다. 어린시절부터 대구의 유명 냉면집에서 냉면기술을 배운 김인주는 특히 육수에 대한 철학이 확고했다. 그는 생전에 냉면을 배우러 온 사람들에게 “평양냉면 맛은 육수가 결정한다. 양념 맛이 겉으로 드러나선 안된다. 고깃국물 안에 은은히 깊게 배어 있어야 제맛이 나고 뒷맛도 깔끔하다”(<서울백년가게> 2019년, 이인우 지음, 자음과모음 펴냄)고 가르쳤다. 그는 가게가 커지면서 증가하는 육수량을 대기 위해 육수공장을 따로 두고 육수를 생산했다. 을밀대 가게 앞에 늘 주차돼 있는 낡은 봉고차가 당시 육수를 실어나르던 김인주의 ‘달구지’였다. 
 




(문제의 그 '달구지' 앞에서) 

 

   노회찬은 1990년대 초 <매일노동뉴스>(기성언론이 전하지 않는 노동현장의 소식을 세상에 전한 최초의 노동전문 일간지였다)를 발행하던 무렵을 전후에 을밀대를 드나들기 시작했다. 주인 김인주에게 노회찬은 가장 기억에 남는 손님 중 한사람이었다. 두 사람은 어느 날 점심 줄에 서있던 노회찬을 발견한 김인주가 조용히 “다음엔 미리 전화하고 오셔”라고 귀뜸해주는 사이였지만, 이제는 모두 천국에 있으니 따로 줄을 설 것도, 전화하라고 옆구리 찌를 일도 없어서 좋을 것 같다.
 

  “을(乙)에 몰두하다 을(乙)밀대에 왔습니다. 더운 날씨 고생하는 분들 생각하며 잠시 면학(麵學)분위기에 젖어봅니다. 최근 일면식(麵食)도 못한 분들껜 죄송.” 
 

  이 재치넘치는 조어도造語도 2013년 노회찬이 을밀대에 와서 남긴 트윗이다.
 

  을밀대에서 노회찬을 추억한다고 하니 열일 마다하고 통영에서 올라온 장석(중앙씨푸드 대표·노회찬재단 이사) 선생은 노회찬의 고교동창이자 평생의 지우. 신춘문예에 당선할 만큼의 풍부한 시재詩才와 인품이 온몸에서 굴향기처럼 풍기는 백미白眉의 신사. 
 

  “을밀대는 <매일노동뉴스>에 주주로 참여할 때 자주 같이 왔어요. 회찬이가 젊어서 노동운동하고 진보운동을 했지만, 이때는 직원 월급주는 일, 대출 이자내는 일의 어려움도 배우던 때였죠.”
 

  장석은 노회찬이 예술을 사랑하고, 미각을 사랑할 줄 알기에 진정한 민중의 정치인 자격이 있다고 믿는 사람이다. “진보보수를 떠나 운동가가 무슨 미식 운운이냐고 눈을 흘기는 사람도 있지만, 지나고 보면 그들은 대체로 뭘 모르는 축들이었어요.” 그의 생각에 미美는 본질적으로 조화를 추구한다. 조화 의식에 부족해서는 진정으로 타인을 생각하고, 공동체를 위한 정치를 추구하지 못한다고 생각한다. 
 

  “회찬이는 젊은 시절부터 김밥으로 끼니를 때우는 생활에 누구보다 익숙했지만, 음식이야말로 한 나라, 한 민족의 정체성의 핵심이란 걸 잘 알았죠. 음악에서 음식까지, 노동현장에서 의회까지 그의 세계가 넓을 수 있었던 이유가 아닐까요?”
 

  우리 시대 처음으로 “진보정치를 대중화시킨 정치가”로 역사에 기록될 노회찬은 장석의 말처럼 그의 발길이 닿은 음식의 세계 곳곳에 식객으로서의 자취도 남겼다. 
 

  “여기가 천국! 행복합니다. 노회찬”. 
 

  어느 음식점에 그가 남긴 글귀는 그의 삶을 이루고 있었을 그 자신만의 어떤 지평을 함축한다. 더불어 같은 길을 간다는 연대의 기쁨과 함께 홀로 앞서서 가는 자의 진한 외로움까지도 전율하듯 전해오는 환호다. 

 

  1992년 감옥에서 나오던 서른여섯무렵까지의 노회찬은 겉으론 강고한 혁명가이지만 내면은 수줍음 많고, 자의식 강하고, 사색의 색조로 덮인 사람이었을지 모르겠다. 자리를 함께 한 조승수(전 의원·재단 사무총장), 박규님(재단 운영실장)의 추억. “1992년 진정추 시절 울산에 교육을 왔는데, 이때만 해도 강연 하시는 스타일이 고저가 없는 목소리 톤, 교과서적인 문어체에 경상도식  표준어 였는데 잠이 오지 않을 수가 없었지요. 바로 앞에 앉아서 졸았습니다.(웃음)” 
 

  “감옥에서 나왔다는 소식을 듣고 그가 어떤 분인지 알아보려고 몇사람이 찾아갔어요. 그날 노 의원님은 자신이 엄청 딱딱하고 알 수 없는 말만 늘어놓았다고 한탄했다는데, 사실 우리는 그 3시간동안 하나도 지루하지 않았어요. 그분만 몰랐던 거죠. 자신이 얼마나 재기 번뜩이고 또 멋진 웅변가의 재능을 지녔는지를.”
 

  박규님은 국민승리21시절(권영길을 대선후보로 추대), 수많은 동지들 앞에서 “지금부터 우리는 모두 권영길입니다! 나도! 당신도! 여러분도!”라고 입술을 떨며 열변을 토하던 모습을 전하며 눈물을 글썽인다.
 

  필자와 노회찬의 인연은 기자와 정치인의 관계 속에 있었다. 2011년 봄, 그가 노원에서 이듬해 총선을 준비하고 있을 때였다. 민주노동당과 진보신당의 재결합을 포함해 진보정당 통합이 논의되던 때이기도 했다. 그는 지역구 출마 준비가 몸에 안맞는 옷을 입은 사람처럼 여전히 어색해보였지만, 현장운동가가 왜 의회로 가려고 하는지, 왜 진보정당의 의회진출이 절실한 지를 온힘을 다해 알리고자 했다. “20년 전에도, 20년 후에도 내 꿈은 진보정당의 집권”이라던 그의 말은 지금도 생생하다. 
 

  그를  마지막 본 것은 지난해 4월27일 문재인대통령이 김정은국무위원장과 판문점 도보다리에서 역사적인 남북정상회담을 하던 날 그날, 바로 이 을밀대에서였다. 그는 이정미 대표 등 당직자들과 점심회식을 마치고 나오다가 필자를 보고 반갑게 손을 잡아주었다. 얼마 후 그가 그렇게 황망히 우리 곁을 떠날 줄 알았다면, 좀 더 따뜻한 손으로 좀 더 굳세게 그의 손을 잡아줄 걸 하는 회한이 떠나지 않는다.
 

  몇 잔의 소폭 잔에 잠시 회한을 실어보내고 우리들은 노회찬이라는 선인을 추억하며 모처럼 즐거웠다. 그가 없는 현실만 빼면 왕후장상이 부럽지 않은 봄날 을밀대의 오후.
 

  일찍이 살기 위해 먹느냐, 먹기 위해 사느냐는 질문을 받는다면 자신은 먹기 위해 사노라, 라고 대답하겠다던 노회찬. 그 우문직답 속에는 평생을 민중의 삶을 직시해 온 따뜻한 혁명가의 진실이 을밀대 육수맛처럼 배어있다.
 

  “어이 장이사, 조의원, 조박사, 박실장, 나빼고 뭐하는 거야? 어라, 이기자는 어쩐 일이야?”
  라고 하면서 방문을 쓰윽 밀고 들어와 어느덧 우리들 사이에 앉아 있는 노회찬을 만나고 온듯하다. 
 

  “지금 진보진영이 내게 부여한 사명은 서울에서 진보정당 최초의 지역구 의석을 확보하라는 것이다. 그 소명을 꼭 달성하고 싶다. 청년시절부터 민주화운동을 하면서 내가 가졌던 꿈은 대부분 현실로 이뤄졌다. 그것도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빠르게. 그래서 나는 지금 내가 꾸는 꿈도 머지 않은 장래에 이뤄질 것이라고 믿는 편이다. 전쟁 걱정이 없는 나라, 학력과 신분으로 차별받지 않는 나라, 일자리가 많은 나라, 애 낳고 기르는데 불편함이 없는 나라, 병원가는데 걱정이 없는 나라, 온 국민이 악기 하나쯤은 다룰 줄 아는 나라… 이런 나라가 현실에서 꼭 불가능할까? 나는 가능하다고 믿는다. 과거의 내 소망이 다 이뤄졌듯이 내 살아생전에 이뤄지는 것을 보고 싶다. 어쩌면 생각보다 훨씬 빠를지도 모른다.”(그는 이듬해 치른 총선에 통합진보당 후보로 당선했다. -2011년 3월14일 <한겨레가 만난 사람>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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