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단 소식
[민들레(74호)] 기록되지 않은 삶들의 자리에서
기록되지 않은 삶들의 자리에서
— 구술생애사와 『우리들의 드라마』를 지나며
이선주 (방송작가, 강연기획자)
노회찬재단의 실천하는 인문예술교실은 구술생애사 강좌로 첫걸음을 내디뎠습니다. “서로 돌봄과 치유의 과정”을 모토로 2023년 봄과 2024년 가을, 두 차례에 걸쳐 열린 이 강좌는 모두 자연스럽게 후속 모임으로 이어졌습니다. 참여자들은 “누군가의 삶을 기록으로 남기고 싶다”는 마음 하나로 1년이 넘는 시간을 함께 걸었습니다. 말의 속도를 따라가고, 화자의 언어를 존중하며 지켜내는 태도로 기록되지 않았던 삶들을 역사로 세우는 힘을 길러낸 것이지요.
1기와 2기의 과정에서 우리가 얻은 가장 큰 성과는 글쓰기 기술이 아니라 ‘태도’였습니다. 서두르지 않고 끝까지 들어주는 태도, 한 사람이 살아온 시간의 결을 손끝으로 더듬는 기록의 자세 말입니다. 난치병 아내를 돌보며 그것을 “마지막 운동”이라 부른 전직 교사, “겨울 같은 봄”을 버텨낸 봉제노동자, “열 번의 사계”를 거쳐 싸워온 해고노동자의 이야기…. 그렇게 이름 없는 삶들이 제 자리에서 역사가 되었습니다.
구술생애사 수업이 지닌 진짜 의미는 ‘역사’를 새롭게 정의하는 데 있었습니다. 역사가 특별한 누군가의 전유물이 아니라, 우리가 살아내는 일상 그 자체임을 확인하는 시간이었습니다. 거리에서 마주치는 배달노동자의 피곤한 얼굴, 지하철에서 스쳐 가는 요양보호사의 서두른 발걸음 뒤에도 치열한 드라마가 숨어 있음을 발견하는 과정이었습니다. 기록자들 역시 변화했습니다. 처음에는 “글을 잘 써야 한다”는 부담으로 시작했지만, 점차 “이 사람의 삶을 온전히 담아야 한다”는 책임으로 성장해 갔습니다.
이 여정의 첫 결실은 지난 7월 세상에 나온 노회찬 7주기 헌정도서 『우리들의 드라마』였습니다. 1기에 참여한 11명의 기록자가 참여해 완성된 아홉 편의 생애사가 옴니버스처럼 이어지는 이 책은 제목만으로도 마음을 울립니다. 거창한 서사가 아니라 바로 “우리들”의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이 작업이 헌정도서로서 의미를 갖는 이유도 분명합니다. 권력자나 기득권층이 아닌, 소외되고 배제된 이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고 그 삶을 기록하는 일. 그것은 노회찬 의원이 평생 추구했던 신념이기도 했습니다.
『우리들의 드라마』는 단순한 기록집을 넘어 하나의 선언문이기도 합니다. “누구나 자신의 삶을 이야기할 자격이 있으며, 그 모든 생애는 기록될 가치가 있다”는 메시지가 책 전체를 관통합니다. 읽고 나면 누구나 “나도 써보고 싶다”는 용기를 얻습니다. 이 책이 증명하는 것은 전문가가 아니어도, 오래 들은 시간과 진심 어린 망설임으로 충분히 한 사람의 역사를 써낼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지난 9월 2일, 전태일기념관 울림터에서 열린 출간 기념 북토크 “삶을 듣고, 삶을 말하다”는 그 확인의 자리였습니다. 구술자와 기록자가 함께 무대에 올라 서로의 여정을 나누는 순간, 기록은 단순히 글로 남는 일이 아니라 관계를 새롭게 세우는 과정임을 보여주었습니다. 정양언·정연빈 부녀의 대화에서는 “가장 가까운 사람부터 시작된 기억의 재구성”을, 세 명의 기록자가 함께 붙든 김인자 님의 삶에서는 협업의 깊이를, 이용관·김혜영 부부의 이야기에선 애도를 넘어 기억을 이어가는 기록의 힘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그날 밤, 저는 객석을 가득 채운 청중의 눈빛을 바라보며 생각했습니다. 이들 모두 언젠가는 누군가의 구술자가 되고, 또 누군가의 기록자가 될 수 있겠다고. 비전문가의 기록이야말로 정답보다 망설임이 진실에 더 가까울 때가 있다는 사실을 다시금 확인했습니다.
『우리들의 드라마』와 1·2기의 여정이 남긴 것은 분명합니다. 세상에 시시한 삶은 없다는 것, 기록될 가치 없는 이야기는 없다는 것. 중요한 건 그 삶의 가치를 발견하고, 기록으로 남기려는 우리의 의지일 뿐입니다. 언젠가 6411번 새벽버스에 오르던 사람들이, 돌봄과 노동의 한낮을 살아낸 이들이, 잊힌 이름들과 함께 더 큰 이야기들로 세상에 기록되기를 바랍니다. 『우리들의 드라마』는 그 시작일 뿐입니다. 그러나 그 첫걸음이야말로 가장 단단하고 귀한 출발이었습니다.